글 I 이종철(월간 w.e.b. 편집장)



현대자동차의 패밀리룩

[브랜드를 상징하는 디자인, 패밀리룩]


최근 ‘제네시스 EQ900’ 렌더링 이미지와 스파이샷이 노출되며 ‘제네시스 브랜드’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곧 출시될 EQ900은 제네시스만의 웅장한 라디에이터 그릴, 과감한 범퍼 디자인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이 과감한 디자인 외에도 제네시스 EQ900이 주목받은 또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신차가 기존 제네시스 차량의 디자인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현대자동차의 새로운 ‘패밀리룩’ 라인업인 셈이죠. 해외에서는 이미 이 패밀리룩에 대한 개념이 잘 계승되고 있는데요. 패밀리룩은 무엇이며, 왜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초기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적용한 아반떼와 쏘나타

[초기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적용한 아반떼와 쏘나타]



패밀리 룩이란 무엇일까


패밀리룩이란 자동차 외관 디자인에 공통적인 디자인 요소를 삽입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는 디자인방식을 말합니다. 시작은 자동차의 고향 격인 유럽이었습니다.

독일 B사의 상징, 콩팥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키드니 그릴(Kidney Grill)’은 82년 전인 1933년, 베를린모터쇼에 출품된 6기통 중형세단 '303시리즈'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이 회사는 원래 항공기 엔진을 만드는 회사였고, 이전부터 디자인 역량이 뛰어났지만, 유산(헤리티지, Heritage)으로 남길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갖고 있지 않았는데요. 1932년 수석 디자이너 프리츠 피들러(Fritz Fiedler)가 또 다른 디자이너 일(Ihle) 형제의 디자인을 차용하며 탄생했습니다. 당시에는 계승해야 할 유산이나 디자인 아이덴티티로 인정받지는 못했었습니다. 이후 B사는 계속 이 그릴의 형태를 변경하며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쌓아가게 되는데요. 이 유산이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해당 업체가 독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제2차 대전 종전 후 연합국으로부터 생산 금지 명령을 받으면서 판매량이 줄었는데요. 1959년, 판매량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디자인 아이덴티티로 시작하자’라는 움직임이 있었죠. 이는 영국의 J사, 또 다른 독일 B사, 일본의 T사,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체들이 이미지 개선 및 마케팅 쇄신을 위해 주로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당시 B사의 대주주인 콴트가 “기존 그릴 형태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살아남게 되었죠. 자칫하면 B사는 80년 넘게 장수할 수 있는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그렇다면 패밀리룩은 왜 필요하며 장점은 무엇일까요?


패밀리룩 적용 이전의 아반떼RD

패밀리룩 적용 이전의 아반떼XD

패밀리룩 적용 이전의 아반떼HD

[패밀리룩 적용 이전의 아반떼(RD, XD, HD 순)]



유산을 중요시하는 유럽 문화와 디자인 개념의 결합


2015년 현재, 전 세계 젊은이들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일본, 동남아 등 젊은이들의 모습이 미국 젊은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아이폰을 전 세계 동일 규격으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다만 인터넷 등장 이전에는 각국 문화, 특히 소비문화는 상당히 다른 편이었습니다. 주(州)마다 특성이 다르고 다양성에 익숙한 미국이 있고, 전통을 고수하며 바꿀 건 바꾸자는 유럽이 있고, 신흥시장으로 각광받으며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가 있었죠. 이 중에 ‘유산’과 이를 개선하며 발전시키자는 ‘디자인’ 개념은 유럽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키워드였습니다. 따라서 유럽차들은 주로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패밀리룩을 점차 도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패밀리룩의 장점은 ‘아이덴티티’의 구축과 강화입니다.


현대자동차 고급차 라인업의 이전 패밀리룩

[현대자동차 고급차 라인업의 이전 패밀리룩]



패밀리룩은 디자인 아이덴티티의 계승


82년 전, B사가 그릴을 만들며 이를 유산으로 전승하려는 생각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는 기관차나 마차 같은 디자인에서 낮거나 짧은 유선형의 현재 자동차 디자인으로 끊임없이 발전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중 자동차에 꼭 필요한 외관 요소, 즉 헤드램프, 범퍼, 그릴, 바퀴 등을 제외하면 완전히 다른 기종으로 보일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유럽인들은 마케팅 개념이 없었던 당시에도 지난 세대의 디자인을 도입하는 시도를 꾸준히 했는데요. 자동차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어느 회사에서 나온 자동차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는 마케팅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나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되었습니다. ‘브랜딩’ 개념이 등장한 것입니다. 브랜딩은 브랜드 내 제품이나 서비스 판촉을 말하는 마케팅을 넘어, 브랜드 전체의 정체성을 알리고 홍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의 자동차 브랜드는 각 사의 차량 특징에 맞춰 브랜드의 느낌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소비를 촉진하는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최근의 자동차들은 대부분 시각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안전이나 고급 지향 등 엄격한 디자인 철학에 의해 디자인을 만들어내고 있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 ‘브랜딩’하고 있는 것입니다.


헥사고날 그릴을 더 인상 깊게 그려낸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아이덴티티

[헥사고날 그릴을 더 인상 깊게 그려낸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아이덴티티]


각 제조사 자동차 그릴의 형태를 살펴보면 키드니 그릴 외에도 넓은 그릴, 방패 형태의 그릴, 세 개로 나뉜 그릴 혹은 숨겨 놓아 보이지 않는 그릴도 있습니다. 최근 이 그릴들의 형태가 공기순환 효율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하단에 라디에이터를 숨겨 우회하는 방법으로 디자인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근 각 제조사 그릴의 형태는 디자인 아이덴티티로 브랜딩을 하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디자인 철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국산 차의 경우,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변화하는 트렌드와 국내 시장의 수요에 맞춰가는 디자인을 꾸준히 선보였는데요. 따라서 패밀리룩이 정립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국산차가 전 세계로 수출되며 알려지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인정받게 되면서 국산 차에게도 디자인 철학과 유산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는데요. 이때 등장한 것이 현대자동차의 플루이딕 스컬프처가 되겠지요.


공개된 제네시스 EQ900 렌더링 이미지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패밀리룩

[공개된 제네시스 EQ900 렌더링 이미지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패밀리룩]



플루이딕 스컬프처의 시작


현대자동차는 2000년대 중반에 출시한 그랜저 TG와 NF 쏘나타의 외관에서 유사성이 발견되면서 ‘드디어 패밀리룩을 시도하는 것이냐’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차종 외 다른 차종과의 유사성이 발견되지 않아 ‘현대자동차 전체를 아우르는 패밀리룩’으로 평가받긴 어려웠지요.

이후 현대자동차는 ‘부드러운 역동성’을 강조, 공기 흐름을 디자인하는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디자인 철학으로 하는 다양한 신차를 출시했습니다. 그런데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외관의 유사성을 좇는다기보다는 공기역학에 대한 설계에 가까웠죠. 따라서 패밀리룩으로 볼 수 있는 디자인은 많지는 않았습니다. 중소형 이하 라인업이나 PYL 라인업에는 이때부터 어느 정도의 패밀리룩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6각형을 말하는 헥사고날 그릴의 중간을 나눈 디자인이 꾸준히 등장했었죠.

이후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피터 슈라이어 CDO 재임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이때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역학뿐이 아닌 디자인적 통일성을 부여한 디자인 철학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기존의 플루이딕 스컬프처로 물 흐르듯 하는 라인을 강조해 패밀리룩의 기초를 마련했다면, 재임 이후에는 시그니처 디자인 요소들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013년 이후 출시한 차들, 제네시스, LF 쏘나타, 아반떼의 외관을 살펴보겠습니다.


과감해진 헥사고날 그릴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아반떼(좌 MD, 우 AD)

[과감해진 헥사고날 그릴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아반떼(좌 MD, 우 AD)]


새로운 플루이딕 스컬프처 역시 ‘부드러운 역동성’을 강조하며 공기의 흐름도 디자인한, 이전 컨셉의 변경이 아닌 발전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현대자동차의 공통적인 디자인도 역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길고 날카롭지만 정돈된 헤드램프, 과감하고 또 과감한 헥사고날 그릴, 직각으로 떨어지는 전면, 날카롭게 빠지는 후면 등, 차종 대부분에 패밀리룩이 적용되어 있는데요. 제네시스는 더 단단하고 글래머러스하게, 쏘나타는 제네시스보다 날렵하게, ‘리틀 제네시스’라고도 불리는 아반떼는 손에 쥐면 빠져나갈 것같이 매끄럽게 디자인됐습니다. 비슷한 룩을 가지면서 차마다 형태를 달리하는 패밀리룩이 완성되고 있는 셈이죠.

최근 공개된 제네시스 EQ900 렌더링 이미지 역시 기존 제네시스(DH)보다 더 넓은 가로 너비를 선보이는 동시에 위의 특징들을 섬세하게 잘 살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차나 미국차 등에는 패밀리룩을 시도하지 않는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패밀리룩에는 단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자동차 신차에 적용된 달라진 헥사고날 그릴

[현대자동차 신차에 적용된 달라진 헥사고날 그릴]



패밀리룩은 디자인의 감옥?


유럽의 한 브랜드는 부산모터쇼에 참가해 “좋은 디자인은 세계 어디서나 통용돼야 하는 것"이라며 “패밀리룩은 감옥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자동차 디자인도 트렌드를 따라 계속 변하는 것이고, 이 흐름에서 패밀리룩을 고수하다 보면 트렌드를 선도하지 못하고 뒤처질 수 있다는 발언인데요. 설득력 있는 의견입니다. 과거에 차량군마다 다른 디자인을 선보였던 현대자동차와 비슷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죠. 해당 브랜드는 차량을 크기로 나눠 여러 개의 패밀리룩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패밀리룩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J사 등은 과거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패밀리룩을 포기하고 새로운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선보이기도 하는 등, 패밀리룩 적용에도 장단점을 고려한 여러 방식이 있죠. 고급 차 브랜드의 경우 최고급 차와 그 아랫급 차량 디자인이 지나치게 비슷해 주력으로 미는 최고급 차가 팔리지 않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기존 제네시스(DH)와 제네시스 브랜드 콘셉트카에서도 패밀리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존 제네시스(DH)와 제네시스 브랜드 콘셉트카에서도 패밀리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어느 나라 디자인’이다 하는 것은 자동차 브랜드에 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브랜드는 국적보다 전 세계에서 사랑받아야 하는 브랜드가 되었기 때문이죠. 다만 ‘어느 브랜드의 차’ 같은 개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 약 5년 전 해외여행을 다닐 때면 길에 널린 국산 자동차들이 다양한 외산차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는데요. 최근에 해외여행을 갔을 땐 멀리서 봐도 플루이딕 스컬프처의 ‘현대자동차’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이처럼 패밀리룩은 단순히 자동차 디자인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브랜드를 입히고, 이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인정받으면서 한 나라의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 한국의 얼굴이 될 현대자동차의 신차 디자인,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겠지만, 또한 예상할 수 없는 즐거움이 가득한 패밀리룩으로 전 세계를 누빌 현대자동차의 브랜드를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제네시스 브랜드 런칭 티저 이미지

[제네시스 브랜드 티저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플루이딕 스컬프처와 패밀리룩]



월간 w.e.b. 이종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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