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상현(자동차 저널리스트)

사진 | 최진호(Gooood Studio)




<들어가는 말>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인 2015년 2월, 불현듯 ‘편하게 탈 수 있는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니 후보도 명확했습니다. 이 조건 하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차는 역시 쏘나타와 그랜저였고, 잠깐의 고민을 마친 뒤 덜컥 그랜저를 구입하였습니다. 

줄곧 스포츠성향 짙은 차만 보유해왔던, 그야말로 카마니아를 자처하는 제가 이런 성격의 차를 구입하게 될 거라고는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왜 샀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약 2만km를 달려보니 잠깐의 시승으로는 감지할 수 없었던 가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왜 그토록 사람들이 그랜저를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아요. 이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들, 아래의 ‘롱텀시승기’를 통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필자는 자동차에 미쳐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네다섯 살부터 차를 좋아했었던 거 같아요. 뭐, 이 정도면 선천적이었던 거라고 봐야겠네요. 그때는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렸던 이유가 ‘신문’이었습니다. 퇴근길에 가져오신 신문을 받아다가 자동차 광고가 실렸는지 확인하는 그 맛은 즉석복권을 긁는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만약 광고가 등재되어 있다면 단숨에 부엌에서 가위를 가져다가 그 차를 오려두곤 했었죠. 이윽고 학창시절에는 <자동차생활>이나 <카비전> 같은 전문지를 매달 정독하며 차에 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결국 사회인이 된 지금은 자동차 콘텐츠를 만드는 일까지 하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차가 너무 좋아 직업으로까지 연결한 저는 그야말로 ‘카마니아’인 겁니다. 그중에서도 트랙과 굽잇길 달리기를 즐기는, 카마니아 중에서도 극단적인 성향의 인간인 거죠.


5세대 그랜저(HG)


그런 제게 취미가 아닌 ‘이동수단으로 자동차’가 필요해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난해 2월 서울역 주변으로 직장 위치가 바뀐 것이죠. 이에 날마다 성남시 분당구의 집에서 출발해 서울 중심을 돌파(?)하는 입장이 된 거예요. 당시 보유하고 있던 차는 독일 P사의 오픈톱 스포츠카. 주말에 타기에는 즐거웠지만, 출퇴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합니다. 차를 하나 더 들이기로. 조건은 명확했습니다. 무조건 편할 것. 이는 그저 운전이 편한 것뿐만 아니라 유지나 관리, 주변 시선으로부터의 자유까지 포함하는 의미였습니다. 이에 자연스레 수입차는 탈락. 개인적으로 국산화 과정 속에서 완성도를 깎아 먹었다고 평가하는 일부 국산차 메이커도 탈락. 남은 건 현대와 기아자동차였습니다. 사실상 형제차를 만드는 회사들이지만 기아자동차보다 현대자동차가 완성도가 2% 더 높다고 판단, 결국 최종 선택지는 현대자동차였죠.

 7세대 LF 쏘나타

[가장 먼저 후보로 떠올랐던 7세대의 LF 쏘나타]


예산은 3,000만원. 이에 따른 가장 강력한 후보는 구매 시점(2015년 2월)에서 가장 뜨거웠던 7세대 쏘나타(LF)였습니다. 당시 필자가 일하던 월간 <자동차생활>에서 독일 V사의 중형차와 비교시승을 진행했었는데 가속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위라고 여겨졌었거든요. ‘본질로부터’라는 슬로건대로 하체가 잘 조율되어 있었고 운전대를 통해 느껴지는 감각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널찍한 실내와 극강의 실용성, 튀지 않는 생김새도 마음에 쏙 들었지요.


5세대 그랜저(HG)


그러다 우연히 그랜저의 가격표를 살펴보게 됩니다. 이게 웬걸? 생각보다 저렴한 겁니다. 가솔린 2.4L 모델(모던)이 2,988만원. 원래는 3,024만원이었는데 2015년 1월부터 2,000cc 초과 자동차의 개별소비세가 1% 인하됨에 따라 36만원 내려앉은 거였죠. 당시 20만원의 ‘설 귀향 프로모션’까지 있었기에 정말이지 경제적인 면에서의 매력이 철철 넘쳤습니다. 그랜저를 이렇게 저렴하게(?) 살 수 있다니. 참고로 현시점(2016년 2월)의 값은 더 저렴합니다. 고작 2,933만원이에요. 개별소비세가 추가 인하된 까닭이죠. 아, 이 사실을 짚고 나니 배가 살짝 아프네요. 



자칭 카마니아의 그랜저


5세대 그랜저(HG) 내부


그랜저로 차종을 결정하긴 했지만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랜저. 지독한 ‘카마니아’인 내가 이런 심심한 차를 타도되는 걸까. 편한 걸 넘어서 심심한 주행감에 물컹거리는 서스펜션, 쓸데없이 큰 차체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거 같은데 혹시 금세 팔아 치우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고민은 지속되었습니다. 주변의 마니아 친구들처럼 자그마한 핫해치 따위를 타야 옳은 게 아닐까. 그랜저를 사면 아저씨처럼 보인다고 하지는 않을는지…

잡념이 길어지자 ‘구매 목적’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제게는 앞서 언급했듯이 ‘편한 차’가 필요한 거였더군요. 그렇게 제 결심에 확신을 갖고 현대자동차 대리점을 방문하게 됩니다.


5세대 그랜저(HG)_엔진


그랜저는 4기통 2.4L 가솔린과 V6 3.0L 가솔린, 하이브리드, 3.0L LPi, 2.2L 디젤의 엔진 라인업을 갖고 있습니다. 이 중 주력은 역시 가솔린, 그중에서도 2.4 모델의 인기가 높지요. 그래서 필자도 고민 없이 2.4로 가기로 했습니다. 3.0의 270마력도 좋지만 2.4의 190마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무엇보다 가격이 더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6기통 엔진보다 4기통 엔진의 유지비가 낮다는 점도 매력이었습니다. 참고로 그랜저 2.4 모델의 연비는 L당 11.1km입니다.


준대형 세단의 기준 그랜저 이번엔 하이브리드의 기준이 되다

 

5세대 그랜저(HG) 내부


2.4 모던 모델은 그랜저 라인업 중 기본형에 해당하지만 탑재되는 장비는 호화로울 지경입니다. 역시 많이 팔리는 차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듀얼 머플러와 LED 안개등, LED 테일램프가 기본이고 우드 스티어링 휠에는 열선까지 들어 있습니다. 천장은 스웨이드로 마감되어 있고 나파가죽을 입힌 시트도 기본입니다. 시트 열선은 앞뒤 좌석 모두에 들어갑니다. 이외에도 스마트키, 2존 풀오토 에어컨, 전후방 주차센서, 크루즈 컨트롤, 퍼들램프, 룸미러 타입 하이패스가 탑재되었고 에어백은 뒷좌석의 사이드 에어백까지 포함해 9개. 법제화된 TPMS(타이어공기압경보장치)나 VDC(자세제어장치)도 당연히 기본입니다. 이 값에 이런 장비를 제공한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더군요.


5세대 그랜저(HG) 컬러 TFT LCD 디스플레이


가장 반가웠던 건 내비게이션을 선택하지 않아도 멀티미디어 시스템의 디스플레이가 컬러 TFT LCD로 제공된다는 겁니다. 6인치로서 작은 편이지만 여기서 후방카메라의 영상을 띄우고 공조장치 정보, 음악 정보 등을 보여줘 활용성이 높습니다. 순정 내비게이션보다 스마트폰 내비에 의존하는 제 경우 내비게이션을 선택하지 않으면 으레 흑백 LCD가 적용되어 아쉬움이 컸었거든요. 근데 그랜저는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이는 저처럼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유용하게 쓰시는 분들이 반가워할 만한 일인 듯합니다.


5세대 그랜저(HG) 파노라마 선루프


기본 장비들이 풍부하니 선택 품목(옵션)을 더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방감을 높여주고 중고로 팔 때 유리한 파노라마 선루프를 선택하고 베젤 부분이 블랙으로 처리된 제논 헤드램프와 조명 타입 도어스커프, 18인치 휠이 묶인 ‘스타일링 패키지’를 더했지요. 참고로 스타일링 패키지를 선택하면 표준형의 17인치 타이어보다 더 고급형의 타이어(한국타이어 S1 노블 2)가 끼워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이즈 역시 17인치는 225/55지만 18인치는 245/45로 주행안정성을 높이는 데 일조합니다.

 

5세대 그랜저(HG)


외장은 흰색인 아이스 화이트를 택했습니다. 추가금 10만원을 받지만, 검정이나 은색, 쥐색 등은 너무 나이 들어 보일까 싶어 결국 화이트가 최선이더라고요. 근데 막상 흰색으로 선택하고 나니 ‘엄마차’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대신 흰색이라서 2014년의 페이스리프트 때 더해진 리어 범퍼 하단의 까만 장식이나 달라진 안개등 주변 처리가 눈에 띄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아울러 독특한 윈도 라인도 돋보이고요. 


5세대 그랜저(HG) 브라운 색상 내장


내장은 심심한 블랙 대신 브라운으로 골랐습니다. 지금도 이 선택은 아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오염에 강하고 남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주거든요. 실제로도 타는 사람마다 실내 컬러가 멋지다고 난리입니다. 대신 브라운 내장을 고르면 까만 우드그레인이 한층 밝은 톤으로 바뀌는데 이게 살짝 올드해보여 아쉽기도 합니다. 젊어진 제네시스와 달리 그랜저는 좀 보수적인 성향인 거 같아요.


5세대 그랜저(HG)


이렇게 구성된 제 그랜저는 2015년 2월 당시 3,206만원이었고 현재(2016년 2월) 기준으로는 같은 조건에서 3,137만원입니다. 있을 거 다 있는 그랜저가 3,000만원 초반대라니, 너무 매력적인 가격 아닌가요? 이렇게 제 자동차 보유 이력 상에서 가장 심심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편한 ‘그랜저’가 한 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2015 그랜저 & 그랜저 디젤, 원형을 지키며 프리미엄의 상징이 되다. 



편하지만 심심한 건 아니다


5세대 그랜저(HG) 주행


그렇게 어느덧 2만km를 달렸습니다. 시승기를 쓰는 지금도 그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는 건 그랜저가 구매 목적(편한 차)에 맞는 역할을 잘 수행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랜저를 몰 때는 마치 가정용 소파에 앉아 쉬는 기분이 듭니다. 푹신한 시트, 가벼운 운전대, 광활한 실내는 운전을 ‘휴식’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동안 탔던 차들은 운전을 ‘전투’로 만들었었는데 그랜저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전반적으로 소음이 적고 승차감도 좋습니다. 변속은 어찌나 부드럽게 이뤄지는지 현재 몇 단에 물렸는지 알아채려면 모든 감각을 트랜스미션 쪽에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행감이 예전의 그랜저처럼 물컹거리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법 탄탄하게 움직여서 ‘그랜저 스포츠’라는 이름도 어울릴 거 같아요. 18인치 휠과 45시리즈 타이어 덕에 이따금 쿵쾅거린다는 기분도 들지만, 결정적으로 댐퍼의 스프링 감쇠력이 높은 편입니다. 국산차의 성향 70%에 독일차의 성향 30%를 버무린 거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5세대 그랜저(HG)


고속안정성은 수준급입니다. 한 번은 서울에서 부산을 당일치기로 왕복했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더군요. 고속도로에서 몰아보면 ‘아저씨들이 장거리 출장 갈 때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속에서 불안하면 심리적으로 지치기 마련인데 그랜저는 이런 피로로부터 자유롭다는 얘기입니다. 코너링 특성은 철저히 언더스티어입니다. 운전대를 마구 휘둘러도 후미가 미끄러지지 않지요. 반면 핸들링은 느슨한 편. 차의 성향을 고려해 운전대의 반응을 느긋하게 설정한 듯한데 ‘카마니아’인 제 입장에서는 마치 이끼 낀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5세대 그랜저(HG)


4기통 2.4L 엔진은 큰 차체를 부족함 없이 이끌어줍니다. 유독 저회전에서의 토크가 좋아서 시내에서 속도를 붙이기 용이하죠. 고회전에서도 지치는 기색 없이 꾸준히 파워를 분출해 상당히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현행의 2.4 모델은 초저배기차 규제를 충족, 저공해차 3종에 등록되어 공영주차장과 남산 터널 등의 요금에 대해 50%의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까르륵’거리는 특유의 노킹은 불만입니다. 이는 엔진을 저회전(1,300~1,800rpm)에 머물게 하는 변속기 탓인데요. 연비를 생각한 세팅이라는 건 존중해줄 수 있지만 제 판단에는 회전을 200rpm 정도 더 쓰게끔 유도하는 게 내구성 면에서 더 유리해 보입니다.



아쉬운 점은 없었냐고요?


5세대 그랜저(HG) 평균연비 L당 10.905


직접 보유해본 입장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랜저는 유지나 관리 측면에서 아주 유리한 차라는 겁니다. 일단 유지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비가 좋습니다. 공인연비는 11.1km/L이지만 고속도로에서는 15km/L을 어렵지 않게 낼 수 있고 시내에서도 10km/L보다 나쁘게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실제로 시승기를 작성하는 현재까지 스마트폰의 차계부 어플에 주유 내역을 기록해왔는데 L당 10.905km의 연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내주행 비중이 50%를 넘기는데 말이에요. 못 믿으실까 싶어 ‘인증샷’도 함께 첨부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소형차급 연비 아닌가요?

게다가 잔고장 때문에 서비스센터를 들락거린 적도 없습니다. 적산거리 5,000km와 1만5,000km 때 합성유로 엔진오일을 교환해주었고 에어컨 필터를 1회 교환한 것 말고는 유지에 들어간 비용이 전무합니다. “오일만 갈면서 타면 된다”는 말, 그랜저에 정확히 들어맞는 셈이죠.


5세대 그랜저(HG) 계기판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겠어요. 일단 직분사 엔진 특유의 소음이 거슬립니다. ‘음량’이 크다는 게 아니라 ‘음색’이 별로라는 뜻입니다. ‘찰찰찰’거리는 특유의 고압펌프+연료분사 소리는 그랜저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울러 액셀러레이터 페달의 반응이 비선형적인 것도 제 성향과 맞지 않습니다. 초반에 답력이 몰려 있어 차가 너무 왈칵거리며 튀어나가는 느낌이랄까. 비록 소소하지만 이런 점은 다음 세대에서 개선되길 바라는 부분입니다.



잘 팔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5세대 그랜저(HG) 뒷좌석


평생 인연이 닿지 않을 줄 알았던 무색무취의 자동차가 제 삶에 온 뒤부터 자동차를 보는 관점이 살짝 달라졌습니다. 그저 빠르고 즐겁게 달리는 것이 자동차가 선사하는 가치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탑승객을 편안히 모시는 차도 제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런 차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 역시 메이커가 할 일이라는 거죠. 그랜저를 구입하고 나서는 본의 아닌 배려심도 생겼습니다. 누군가를 태워주면 “차가 너무 편하다”고들 말하거든요. 이런 말은 문이 2개인 차를 탈 적에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칭찬입니다. 스포츠카는 이기심 투성이지만, 그랜저는 그 반대입니다.



그랜저에 대한 저의 만족도를 수치화하자면 95점을 가볍게 넘길 겁니다. 널찍한 실내와 편한 운전, 품질 안정성, 좋은 연비까지 ‘이동수단’으로 가치가 아주 높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제게 다가와 “A에서 B의 장소로 편하게 이동하는 목적으로서의 차를 추천해달라”고 말한다면 저는 명확하게 대답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랜저가 최고”라고. 시승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거 같아요. 왜 그토록 사람들이 그랜저를 좋아하는지, 그랜저가 왜 늘 내수판매 TOP 5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지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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