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I 유정열(여행작가)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가 지났습니다. 처서는 ‘더위가 그친다’는 뜻입니다. 가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절기임에도 가을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늦은 휴가를 즐기며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바닷가에서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만이 이제 가을임을 어렴풋하게 느끼는 정도입니다. 이맘때 괜찮은 여행지로 보령시가 있습니다. 머드축제로 잘 알려진 대천해변에서 발을 담그고 보령이 품은 75개의 섬 중 하나인 삽시도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냅니다. 조선 수군의 주둔지였던 충청수영성에서 나무늘보처럼 느린 휴식을 취하는 여행, 함께 떠나볼까요?


[오천항 충청수영성의 서문, 누각은 없어지고 홍예문만 남았다]


유난히 더운 올여름, 지금도 계곡과 바다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아스팔트의 열기는 뜨겁습니다. 아반떼의 에어컨을 짱짱하게 틀고 서해안고속도로 광천IC에서 나와 21번 국도를 타고 갑니다. 지방도 40호선으로 갈아타고 약 8km를 더 가면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나타납니다. 이어서 보령방조제를 지나면 오천항입니다. 

오천항은 보령시 북쪽에 있는 항구입니다. 오천항의 역사는 오래되었습니다. 백제 시대 때는 ‘화이포’라 불리며 중국, 일본과 교역을 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당나라와 교역을, 고려 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에 맞서 수군을 두었죠. 지금은 전국 물량의 70%를 담당하는 키조개 산지입니다. 마침 9월은 본격적인 키조개 채취를 시작하는 시기로 이 기간에 여행을 한다면 두툼하고 부드러운 키조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충청수영성에서 바라 본 오천항, 멀리 천수만까지 보인다]


점심으로 바지락칼국수를 먹고 오천항 곁에 있는 충청수영성에 올랐습니다. 충청수영성은 충무의 경상수영, 여수의 전라수영과 함께 조선 3개 수군 진영입니다. 조선 태조 5년 때 처음 군영이 설치되었죠. 충청수영성은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자주 출몰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조선 시대 수군의 진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충청수영성은 나지막한 언덕에 있지만 주변을 조망하기에 탁월하다]


한때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큰 규모의 성으로 발전하기도 했는데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청수영성에 수군 약 8천여 명과 군선만 142척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충청수영성의 수군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진주대첩에서 대부분 전사를 하고 맙니다. 이후 충청수영성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고종 33년에 폐지되고 맙니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작은 홍예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성벽을 따라 산책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는 흉년이 들면 빈민을 구제했던 진휼청 건물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 서면 오천항과 보령방조제, 항구를 둘러싼 산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한눈에 봐도 지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무지개문인 홍예문과 전망 좋은 진휼청]


바다에서 육지 안쪽 깊숙한 곳에 항구가 위치한 탓에 바다가 태풍에 휘둘려도 이곳만은 안전했습니다. 산들이 방파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성벽 끝에 서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줍니다. 눈을 돌리면 시인 묵객들이 이곳 풍경을 보며 시를 지었다던 영보정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사방이 트여서 영보정에 누워 낮잠을 청하는 분들도 꽤 될 만큼 시원합니다.


[수영성 성곽에 자분자분 걸어 오르면 보령방조제와 오천항 일대가 훤히 드러난다]


[영보정은 시원하다. 소나무 두 그루가 족자의 그림처럼 드리워졌다]


오천항에서 약 2km 정도 바다로 나아가면 갈매못 순교성지가 있습니다. 병인박해 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랑토니오 주교를 비롯한 두 명의 신부와 이름조차 알 길 없는 오백여 명이 이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조선인은 단 두 명의 이름만이 세상에 알려졌죠. 이들이 순교한 1866년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이 예정된 시기였습니다. 한양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해야 탈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이 오천항 끄트머리 모래사장 위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갈매못성지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엄숙하게 빛이 납니다. 수군들과 순교자들은 숱한 사연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충청수영성과 갈매못성지는 그 이야기들의 흔적입니다.


      [갈매못성지 기념관, 엄숙한 공간에서 마음이 차분해진다]


다시 길을 나서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했습니다. 여전히 한 낮에는 덥습니다. 잠시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요. 대천해수욕장은 길이 3.5㎞, 폭 100m에 달하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입니다. 1932년 개장돼 올해로 84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대천해변은 모래가 좋고 수심이 얕아 해수욕하기 좋다]


백사장을 가로질러 가면 바다는 온통 태양에 물 비늘로 일렁입니다. 사람들은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해수욕을 하며 시원하게 보트를 타고 파도를 가릅니다. 조선 시대 때에도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했다고 하는데요. 선조들이 ‘이열치열’의 방법을 즐겼듯 후손들도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아직 지나지 않은 여름을 즐기고자 바다를 찾은 사람들]


[해수욕이 아니어도 얕은 파도를 따라 산책하면 좋다]


오래전 대천해변에 캠핑을 와서 서걱거리는 모래밭에 둘러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생각도 났습니다. 지금은 머드축제의 메카임을 알려주는 조형물들과 동상들이 예전의 모습과는 다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천 출신의 소설가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도 이런 대목이 나오죠.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새로 바뀐 것을 보며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질문입니다. 바뀌지 않은 것은 넓은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이루는 자연뿐입니다.


  [대천해변에 세워진 머드캐릭터와 인어상]


대천해변에서 지방도 607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남포방조제입니다. 이 길은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죠. 약 5km의 길은 왼쪽으로는 남포면 일대의 농경지가 펼쳐지고 오른쪽 방조제 너머는 서해입니다. 방조제 중간에 있는 죽도보물섬관광지로 향하면 이러한 풍경이 잘 보입니다.


     [남포방조제는 바람을 가르는 길이기도 하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좀 더 한적한 곳에서 바다를 즐기고자 삽시도로 향했습니다. 삽시도는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40여 분을 가면 도착합니다. 충남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맑은 물에 단단한 모래사장, 깨끗한 환경은 삽시도만의 자랑이죠.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좀 더 여유롭습니다. 

새우깡을 사랑하는 갈매기와 놀다 보면 어느새 삽시도, 밤섬선착장에 도착하면 해안을 따라 조개를 채취하는 관광객이 눈에 띄는데요. 조개를 잡는 일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한 바구니 채취하기 위해 열중하는 동안 도시에서의 지친 일상은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새우깡을 먹기 위해 갈매기는 40여 분 동안 삽시도까지 따라 온다]


[맑은 바닷가에서 아빠 따라 돌팔매질하는 아이들]


소위 ‘멍 때리는’시간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해변에서 점점 멀어지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붉게 물드는 구름을 바라보고 수크령은 바람에 살랑거립니다. 가끔 고양이처럼 우는 갈매기 소리가 정적을 깨곤 합니다. 아빠는 바닷가 갯바위에서 낚시하고 아이는 모래사장에 난 구멍 속을 들락날락하는 칠게를 쫓고 엄마는 아이와의 한 때를 추억할 장면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참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갯바위 그늘 아래서 쉬고 아이와 함께 폭신한 해변을 걸어도 좋은 삽시도]


     [아이와 함께 물놀이하거나 울창한 곰솔길을 산책해도 좋다]


[거멀너머해변의 부드러운 노을 아래서 바닷바람을 맞는 것도 좋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습니다. 삽시도를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11km에 불과해 걷기 딱 좋죠. 이 밖에도 하루 2번, 썰물 때 삽시도와 떨어져 섬이 되는 '면삽지', 역시 밀물 때는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면 드러나는 바위에서 솟아나는 석간수 ‘물망터’에서 마시는 시원한 물도 있습니다.

저도 거멀너머해변에서 해수욕을 하다가 그만 안경을 잃어 버렸는데요. 다음날 썰물 때 민박집 강아지가 찾아 주었습니다. 깜순이란 이름의 고마운 강아지는 웃말선착장 부근의 식당으로 가는 길도 안내하고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 다시 민박집으로 안내해 줍니다. 제가 만난 강아지 중 가장 명석했습니다.


[삽시도 여행의 동반자이자 가이드였던 민박집 강아지 깜순이]


이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파도 소리 들으며 밤을 보내는 곳, 삽시도는 늦은 휴가를 보내기 좋은 곳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주의할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삽시도에는 선착장이 두 곳 있는데요. 물때에 따라 윗말선착장과 밤섬선착장을 번갈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삽시도에서 대천으로 나갈 때는 어느 선착장에 배가 도착하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도보여행일 경우, 펜션에 얘기하면 선착장에 픽업해주기도 합니다. 


[삽시도는 편의시설은 조금 부족하지만 가족과 여유로운 캠핑을 즐길 수 있다]



보령에서 맛보는 별미


조은식당

오천항 충청수영성 입구에 있는 칼국수 전문점입니다. 6천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바지락칼국수와 보리밥, 김치전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시원한 칼국수에 아삭한 김치 겉절이를 얹어 먹는 맛이 괜찮습니다.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안길 51(소성리 691-54), 041-932-4090


[오천항 조은식당의 바지락칼국수 상차림]


삽시도해돋는펜션식당

삽시도에는 대부분의 민박집에서 식당을 겸하고 있습니다. 해돋는펜션식당은 오천초등학교 삽시분교장에서 술뚱선착장 가는 해안가에 있습니다. 생선회와 매운탕, 삼겹살, 백숙 등을 맛볼 수 있는 곳인데요. 곁들여 나오는 반찬이 입맛을 돋웁니다.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1길 156(삽시도리 4-1)


[해돋는펜션식당의 우럭매운탕, 탕도 반찬도 정갈하고 맛나다]


여행정보

▶ 대천해수욕장: 보령시 머드로 123(신흑동 2267-3)

▶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 충남 보령시 대천항중앙길 30(신흑동 2241), 1666-0990

삽시도로 가는 배편은 시기에 따라 변동사항이 많다. 여객선터미널에 문의해 정확한 배 시간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또한 삽시도로 가는 배시간은 40분이지만 대천항으로 가는 배편은 여러 섬을 들르기 때문에 시간이 더 소요된다.

대천항 출발 07:30, 13:00, 16:00, 삽시도출발 08:10, 13:45, 17:25(9월30일까지 일정)

▶ 신한해운: 041-934-8772, www.shinhanhewoon.com 

▶ 충청수영성: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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